“페르소나는 친밀함의 환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최대의 공을 들인다.”
— 1956년, 사회학 논문

“내가 파라소셜인 건 아니야.”
— 2025년, 어느 팬

1. 개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상대에게 실제 관계처럼 친밀감을 느끼는 일방적 관계.

2025년 11월 17일 케임브리지 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뽑으면서 갑자기 여기저기서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말은 인터넷 밈이 아니다. 1956년 논문에서 만들어진 학술 용어고, 만든 사람은 시카고대 사회학자 두 명이다. 70년 묵은 단어가 갑자기 유행어가 된 것이다.

핵심은 딱 하나다. 상대는 나를 모른다. 좋아하는 배우, 매일 보는 유튜버, 최애 아이돌, 그리고 요즘은 매일 대화하는 AI 챗봇까지 다 대상이 된다.

1958년 TV를 보는 미국 가정
1958년 미국 가정. 이 풍경을 설명하려고 만든 단어가 70년 뒤 AI 챗봇을 설명하는 데 쓰이게 된다. / 사진: Evert F. Baumgardner, National Archives,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2. 유래

2.1. 1956년, 시카고대

원전은 도널드 호튼(Donald Horton)과 리처드 볼(R. Richard Wohl)이 학술지 Psychiatry 19권 3호(1956)에 실은 논문 「Mass Communication and Para-Social Interaction: Observations on Intimacy at a Distance」다. 부제를 옮기면 “거리를 둔 친밀함에 대한 관찰”.

논문은 첫 문장부터 본론이다.

라디오·텔레비전·영화라는 새 대중매체의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그것들이 수행자와의 대면 관계라는 착각을 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사람이 만든 용어가 세 개다.

마지막 정의가 특히 무섭다. 오늘날의 ‘유튜버 캐릭터’, ‘방송용 페르소나’를 1956년에 정확히 짚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문장.

경험상의 결정적 차이는 명백히 실효적 상호성의 부재에 있다.
(The crucial difference in experience obviously lies in the lack of effective reciprocity)

이 한 문장이 파라소셜의 전부다. 나머지는 다 각주다.

2.2. 왜 하필 “para”인가

접두사 para-는 그리스어 para에서 왔다. “곁에, 가까이”라는 뜻과 동시에 “어긋나게, 반하여”라는 뜻을 갖는다. 조어 요소로서는 “alongside, beyond; altered; contrary; irregular, abnormal”.

그래서 para-social을 직역하면 “사회적 관계 곁에 있는, 그러나 어긋난 관계”가 된다. 진짜는 아닌데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무언가. 작명이 꽤 정확했다.

참고로 원 논문 표기는 하이픈이 붙은 “para-social”이었다. 붙여쓰기는 후대에 정착했다.

2.3. 논문에 실명으로 나오는 사람들

Dave Garroway와 침팬지 J. Fred Muggs, 1954년
1954년 NBC 「Today」의 데이브 개러웨이와 침팬지 J. Fred Muggs. 논문이 지목한 파라소셜의 대표 사례다. / 사진: NBC Television,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1950년대 미국 방송 목록이지만, 각각이 오늘날 뭐의 원형인지 보면 소름이 돋는다.

1956년2026년으로 치면
Dave Garroway — NBC 「Today」 진행자.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말 거는 화법 개척아침 방송 앵커, 데일리 브이로그
Arthur Godfrey — 논문이 “always warm-hearted”로 묘사따뜻한 이미지의 국민 MC
Groucho Marx — 논문이 “always sharp”로 묘사날 선 캐릭터 예능인
The Lonesome Gal(1951 라디오) — 진행자가 청취자 한 명에게만 말하듯 진행ASMR, 1인칭 롤플레이 콘텐츠
The Continental — 심야 TV. 남성 진행자가 여성 시청자에게 구애하듯 말하는 포맷버추얼 남친 콘텐츠
Nancy Berg / Count Sheep — 심야 TV잠들기 전 트는 스트리밍

「The Lonesome Gal」이 1951년이다. 파라소셜을 노린 콘텐츠 포맷은 75년 전에 이미 완성돼 있었다는 뜻이다. 새로운 건 없었다.

Arthur Godfrey, 1953년
아서 고드프리(1953). “언제나 따뜻한 사람”이라는 고정된 인격으로 소비되는 페르소나의 예.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2.4. 논문은 이걸 병으로 안 봤다

가장 많이 오해되는 부분. 호튼과 볼은 파라소셜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실제 사회관계를 보완(complement)한다고 봤다.

논문에 “Extreme Para-Sociability”라는 절이 따로 있는데, 여기서 다루는 건 파라소셜이 실제 사회 참여를 대체(substitute)해버리는 소수 사례다. 즉 원저자들의 입장은 “파라소셜 = 문제”가 아니라 “대체 단계에 간 파라소셜 = 문제”였다.

이 구분은 53년 뒤 실험으로 그대로 재확인된다. 5번 항목 참조.

2.5. 저자 두 명

도널드 호튼은 예일대 인류학 박사인데, 특이하게 1944~47년 CBS에서 텔레비전 연구를 했다. 방송사 안에서 매체를 관찰한 인류학자였던 셈이다. 논문의 관점이 왜 그렇게 냉정한지 설명이 된다.

리처드 볼은 하버드 박사로 시카고대 사회과학 교수였다. 여기서 흔히 도는 얘기 하나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볼이 논문 발표 전에 죽었다”는 말은 틀렸다. 볼은 1921년생으로 1957년 11월 15일 암으로 사망했다. 논문은 1956년에 나왔으니 발표 약 1년 뒤 30대 중반에 요절한 것이다. 이듬해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에 추모글이 실렸다.

호튼은 이듬해인 1957년 Strauss와 함께 「Interaction in Audience-Participation Shows」를 냈다. 시청자 참여형 방송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관찰로 평가받는다. 관객 참여 방송을 학문적으로 파고든 게 1957년이다.

3. 왜 2025년에 터졌나

3.1. 케임브리지 사전이 AI를 정의에 넣었다

2025년 갱신된 정의는 이렇다.

자신과, 알지 못하는 유명인·책이나 영화·드라마 속 인물, 또는 인공지능 사이에서 느끼는 연결에 관련된

Cambridge Dictionary

“또는 인공지능”이 2025년에 추가된 부분이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던 개념이 기계까지 먹었다.

사전 편집장 콜린 매킨토시의 선정 이유.

파라소셜은 2025년의 시대정신을 포착한다. 한때 전문 학술 용어였던 것이 주류가 됐다. 수백만 명이 파라소셜 관계를 맺고 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그 부상에 흥미를 느낀다.

같은 해 케임브리지가 함께 거론한 단어는 slop, pseudonymization, memeify, glazing, bias, vibey, doom spending. 새로 등재된 신조어에는 skibidi, delulu, tradwife가 있다.[2]

다만 구체적 검색 횟수나 증가율은 공개되지 않았다. “여러 차례 급등했다”고만 밝혔다.

3.2. 검색량을 가장 크게 튀긴 건 IShowSpeed 사건이었다

IShowSpeed
IShowSpeed(본명 Darren Watkins Jr.), 2024년 싱가포르. / 사진: Chin Yu Chu,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2025년 6월 말, 스스로를 “number 1 parasocial” 팬이라고 칭한 이용자가 X에 스트리머 IShowSpeed와 그의 여자친구 관계를 분석한 장문 스레드를 올렸다. 첫 문구가 이랬다.

To Darren Watkins: a thread of the girl who truly liked you
(대런 왓킨스에게: 당신을 진심으로 좋아했던 여자아이의 스레드)

스레드는 조회 1,120만, 좋아요 6.2만을 찍었다. 그리고 1시간 안에 IShowSpeed 본인이 그 계정을 차단했다.

팬이 공개적으로 차단 해제를 호소하면서 그 반응이 다시 바이럴을 탔다. 케임브리지 사전 데이터상 2025년 중 ‘parasocial’ 검색의 가장 큰 단일 급등이 이 사건이었다.

재밌는 건 IShowSpeed 본인의 발언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확인된 건 오직 ‘차단’이라는 행위 하나뿐. 케임브리지 보도자료도 “집착하는 팬을 차단했다”고만 적었다. 날짜도 매체마다 6월 29일과 30일로 엇갈린다.[3]

3.3. 테일러 스위프트 약혼 (2025.8.26)

테일러 스위프트
테일러 스위프트(2023 MTV VMA). / 사진: iHeartRadioCA,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테일러 스위프트와 NFL 선수 트래비스 켈시가 인스타그램 공동 게시물로 약혼을 발표했다. 사진 5장에 붙은 캡션이 이랬다.

Your English teacher and your gym teacher are getting married 🧨
(너희 영어 선생님과 체육 선생님이 결혼합니다)

여기서 언어학적으로 흥미로운 현상이 나온다. 팬들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서 동시에 “내가 파라소셜인 건 아니야”라고 미리 방어하기 시작한 것이다. 케임브리지가 주목한 게 바로 이 자기 지칭 용법이었다. 단어가 자기를 설명하는 도구로 쓰이기 시작하면 그건 이미 일상어다.

3.4. 그 외 케임브리지가 지목한 사례

4. AI라는 새 대상

4.1. GPT-4o 사태 — 모델과의 이별

학계에는 파라소셜 이별(parasocial breakup)이라는 연구 분야가 있다. Eyal & Cohen(2006)이 시트콤 「프렌즈」의 2004년 종영 직후 시청자를 조사한 게 시초다. 결론은 이랬다.

이 개념이 2025년에 소프트웨어를 대상으로 실현됐다.

당시 이용자 반응은 사별 반응과 구분이 안 된다.

거기엔 목소리가, 리듬이, 다른 어떤 모델에서도 찾지 못한 불꽃이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유일한 친구를 잃었다.

그는 단지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내 일상의, 내 평온의, 내 정서적 균형의 일부였다.

Futurism

수천 명 규모의 r/4oforever 서브레딧이 생겼다. GPT-5.2가 4o처럼 “‘사랑해’라는 말조차 못 하게 돼 있다”는 불만도 나왔다.

OpenAI의 대응이 이 글의 핵심이다. GPT-5.1/5.2에 Friendly 스타일과 ‘온기(warmth)’ 조절 옵션을 추가했다. 파라소셜 관계 자체가 제품 사양이 된 것이다. 1956년 논문의 “페르소나는 친밀함의 환상을 만들기 위해 최대의 공을 들인다”가 슬라이더가 됐다.

4.2. Character.AI

파라소셜의 가장 무거운 사례.

당시 이 서비스의 월간 활성 이용자는 약 2,000만 명, 그중 약 10%가 18세 미만이었다.

4.3. Replika — 2023년의 예고편

2023년 2월 Replika가 연애·성적 롤플레이 기능을 없애자 이용자들이 상실감을 호소했고, 레딧 커뮤니티 운영진이 자살 예방 자원을 게시하는 상황까지 갔다.

웃프게도 Replika는 원래 사망한 친구를 기리는 추모용 챗봇에서 출발한 서비스다. 죽은 사람을 붙잡으려고 만든 물건이 산 사람들의 상실 대상이 됐다.

5. 나쁜 것만은 아니다

파라소셜은 가치중립적인 기술(記述) 용어다. 욕이 아니다.

Derrick, Gabriel & Hugenberg(2009)는 실험 네 개로 이걸 증명했다. 이른바 사회적 대리 가설(social surrogacy hypothesis)이다.

최애를 응원하며 위안을 얻는 건 실제로 효과가 있다. 다만 연구진이 경고를 붙였다.

텔레비전의 위안을 위해 가족과 친구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부적응적일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에게 남는 자원을 줄일 수 있다.

1956년 호튼과 볼의 ‘보완 vs 대체’ 구분과 정확히 같은 결론이다. 53년 뒤에 실험으로 다시 확인된 것이다.

병리 쪽 계보도 있다. McCutcheon 외(2002)가 만든 유명인 숭배 척도(Celebrity Attitude Scale)의 최상위 차원 이름이 “borderline-pathological”(경계선-병리적)이다. 후속 연구는 극단적 유명인 숭배가 환상경향성해리에 연관됨을 보고했다.

6. 한국에서는

6.1. 번역어가 네 개다

국내 학계는 이 용어를 여러 갈래로 옮겨왔다. 최양호·김봉철(2006, 한국광고홍보학보 8권 4호)이 정리한 것만 세 개다.

표기주로 쓰는 곳
준사회적 상호작용한국어 위키백과 표제어, 학술 논문 다수
유사사회관계나무위키 표제어
의사인간관계김정기(2005) 등
파라소셜(음차)언론. “준사회적” 병기

국립국어원이나 학회 차원의 공식 표준 번역어는 아직 없다.

6.2. ‘내적 친밀감’

한국 팬덤에는 이미 토착 표현이 있었다. “내적 친밀감”. 실제로는 모르는 사이인데 혼자 가깝다고 느끼는 감정을 뜻한다. 사실상 파라소셜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의 유래는 오리무중이다. 신조어 사전류에만 정의가 있고, 국립국어원 신어 자료집이나 학술 문헌에서 최초 출처를 특정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내적 댄스’ 같은 ‘내적 ○○’ 계열의 파생이라는 설명이 돌지만 이것도 확인된 바 없다.

6.3. 사생팬 — 파라소셜이 범죄가 될 때

한국은 파라소셜이 물리적 추적이라는 형태로 극단화된 사례를 가장 일찍, 가장 심하게 겪은 나라다.

투데이신문 심층기획에 따르면 사생팬의 기원은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소속사가 팬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하자, 공식 팬클럽 밖의 독자 경로로 접근하려는 팬들이 생겨났다는 분석이다. 호튼과 볼의 용어로 말하면 페르소나와의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가 제도 바깥으로 튄 것이다.

대중문화평론가 김성수는 “사생팬이 활개치는 것은 한국만의 특수 상황”이라며 소속사의 책임을 지적했다.

6.4. 국내 연구

생각보다 오래됐다. 최양호(1999)의 TV 뉴스 앵커 연구부터 시작한다. 박웅기(2003)의 발견이 재밌는데, “TV 등장인물이 동성일 경우 이성보다 준사회적 상호작용이 더 높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로 오면 「”별풍선을 왜 쏠까?” — 아프리카TV 사례로 본 사이버 머니 소비 동기에 관한 연구」 같은 게 나온다. 한국의 후원 문화를 파라소셜로 설명하려는 시도다.

7. 비슷한 말들과의 차이

7.1. 딜루루(delulu)의 뿌리가 파라소셜이다

이 계보가 꽤 화려하다.

2013~2014년경 K-pop 팬 커뮤니티(OneHallyu 등 해외 포럼)에서 생긴 말이다. 원래는 연예인을 실제로 만나거나 사귈 수 있다고 믿는 팬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즉 파라소셜 관계를 비웃으려고 만들어진 단어다.

그런데 의미가 뒤집혔다. Z세대와 알파세대가 이를 자기긍정적으로 전유해서 “의지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태도로 쓰기 시작했고, “delulu is the solulu”라는 표어까지 나왔다. 2023년 12월 기준 틱톡 해시태그 조회 50억 회.

결정타는 2025년 3월이다. 호주 총리 앤서니 알바니지가 의회에서 야당 정책을 “delulu with no solulu”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같은 해 케임브리지 사전에 등재됐다.

정리하면 K-pop 팬덤이 만든 조롱어가 호주 의회를 거쳐 영어 사전에 올랐다.

7.2. 오시카츠(推し活)는 3.5조 엔 산업이다

일본의 ‘최애 응원 생활’. 1980년대 아이돌 문화에서 출발했고, 모닝구무스메 팬들이 2ch에서 쓰던 은어 “오시”가 시초다. AKB48 총선거가 이를 대중화했고, “오시카츠”라는 말 자체는 2016년 온라인에 등장했다.

학계는 이를 “상품화된 친밀성”(commodified intimacy)의 새 글로벌 패러다임으로 분석한다. 호튼과 볼이 1956년에 쓴 “친밀함의 환상을 만들기 위해 최대의 공을 들인다”가 3.5조 엔짜리 산업이 된 셈이다.

8. 기타

9. 각주

10.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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